나는 사실 승부욕이 별로 없다.
혹자들은 남자들의 세계는 승부의 세계라고 하지만, 사실 난 누군가와 승패를 가리기 보단 그냥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편이다. 뭐랄까 운동을 할때도 어떻게든 이기려고 점수를 내는게 아니라, 점수를 내는 것 자체가 즐겁고 그 점수를 내는 것을 어떻게 하면 예술적으로 낼까..하는 생각을 더 하는 편이다. 아마 복작거리는 승패를 위한 편법이 난무하는(좋게 말하면 융통성이 중요한) 곳에 몸담지 않으려는 기질도 이러한 성격에서 말미암은 부분도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나도 가지면서도 에헴..하고 싶은거냐라고 이야기 하면 별로 할말은 없음.
아무튼 이러한 승부욕의 약화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있는 자질이 되긴 하지만, 사실 논쟁이나 협상에 적극적이지 않은 참여를 낳는다. 어릴적의 이러한 방향성 때문에 나는 벌어진 일에 어떠한 '관점'을 가지는데 등한시 하게 되었다. 그냥 좋은게 좋은거고 그렇게 두리뭉실해졌달까. 사실 건강하게 논쟁을 잘하고 협상을 잘하고 관점을 가지는 것이 살아가고 살아남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관점을 등한시 했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불확실성에 근거하고 있는 듯 하다. 내가 지금 알고 지금 느끼고 있는게 다가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 뿐이다. 혹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생각에 완충 지대를 만들어 놓은 것이랄까. 추진력을 주는 확신을 스스로에게 주려면 스스로를 당장이라도 빠듯하게 설득을 시켜야 한다. 나에게 있어서 이러한 설득의 메카니즘은 스스로 믿음 혹은 거짓말이라고 폄하한 듯 하다. 일반적으로 반대 증거가 나오면 수정을 하면 되는 것을, 나는 미리부터 모르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린 듯 하다.
아무튼 지금에 와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처음엔 '안'해라고 했던 것들은 점점 '못'해진다.
자 이러한 상황, 사회생활과 친구들의 논리적인 영향과 서른넘어의 고집이 합쳐지면서 뒤늦게 슬슬 오기를 부리기 시작한다. 맘편하게 난 이래..라고 있어봤자 어떠한 관계 속에서의 남들은 그 상황을 내가 원하는 만큼 평온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저 온전한 나의 세상을 보전하려면 모든 관계를 단절시켜야 하기 마련이다. 결국 많은 관계속에서 신경을 안 쓰고 있던 승패의 결과에서 몇번 지게 되면 슬슬 욕구가 오기로 표출되는 현상과 마주한다. 지금의 난 여전히 협상은 잼병이지만, 이젠 관점을 가지는 거나 받아들이는 것에는 익숙해 졌고, 문제는 승부욕과 관련된 논쟁이다.
아직도 익숙해 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논쟁에 관련된 부분이다. 가끔 사소한 논쟁의 발단으로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는 나를 보면 좀 서글퍼진다. 원래 익숙도 하지 않은 것이지만 익숙하지 않은 것을 애써 하는데 게다가 사안이 사소하다. 뭐랄까 어느날 저렴한 당구장에서 진짜 이길려고 빠득빠득 거리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그거 몇 푼한다고.
한쪽 방향으로 가는 물길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면 여전히 치우치게 된다. 이제는 조율이 필요할 한 듯 하다. 나도 살아야 하니 사는데 도움이 되는 건 배우고, 사는데 별 도움 안되는 욕구는 좀 넘겨버리는게 필요한 거 같다. 욕구라는게 연습을 해야 되는 거라서 사소한 것에서부터 연습을 꼭 해야 하는거라면 어쩔수 없고. 뭐.
판단을 그르치지 말자.
안어울리는 옷을 입은, 빠득거리는 꽁꽁한 아저씨로 늙어갈 수야 없지 않은가.
ps. 스스로 별로라고 느끼는 부분은, 어떤 사안에 대한 블레임을 나에 대한 블레임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거다.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가 있고 그 면면히 단점이 있고 장점이 있는 건데 그걸 '자아'라고 뭉뚱그려 해석하는 경향때문인 것 같다. 고쳐보자. 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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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6/21 나에 대한 단상 (2)
- 2008/03/18 엇박과 똘끼 (4)
- 2007/08/13 토론의 목적 (5)
- 2007/06/20 언론과 권력 이야기 (10)
- 2007/01/11 Apple의 선공
- 2006/12/21 자아와 미덕사이 (2)
엇-
1 일부 동사 앞에 붙어) ‘어긋나게’ 또는 ‘삐뚜로’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2 (몇몇 명사 앞에 붙어) ‘어긋난’ 또는 ‘어긋나게 하는’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3 (몇몇 형용사 앞에 붙어) ‘어지간한 정도로 대충’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
(다음 국어사전 참조)
엇- 은 사실 어느정도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엇나가다, 엇갈리다, 엇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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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헤비메탈을 처음 들었을 때, Extreme의 Suzi나 SkidRow의 Youth gone wild 같은 노래들처럼 들으면 참 신나는 노래가 있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들 노래는 그 신나는 리프들을 엇박자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마 이런 노래들의 모든 음표가 모두 정박자에 착하게 존재하고 있었더라면 그리 신나거나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전달 할 수 없었을 듯 싶다.
요즘 나의 화두가 바로 이런 것이다. 엇나가는 것의 긍정적인 효과라고나 할까. 나는 정박자의 인생'만'을 살기에는 일정부분 엇박의 기분이 주는 짜릿함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약간(많으면 낭패;;) 똘끼 있는 사람이 좋다. 너무 완벽하고 온전한 사람들보단, 때론 예상치 못한 반응과 예상치 못한 생각들을 늘어놓는 준수한 사람들이 더 좋다. 그네들과 이야기 하고 있으면 노래에서 엇박이 주는 생동감 처럼 신나기도 하고 호기심에 넘치기도 한다. 단순한 개성의 차원이나 4차원 성격 말고, 이유있는 이러한 기질은 정박자 인생보다 살아가는데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슬슬 믿고 있다. 그리고 '성공'이라는 것의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이것이 나의 엇박 예찬론이다.
나는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믿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진화라는 것의 메카니즘은 우수한 돌연변이의 어디에선가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돌연변이라면 그저 도태될 뿐이겠지만, 괜찮은 돌연변이는 어느 기작에선가 나은 방향으로의 진화를 이루는 시발점이 된다고 생각한다. 암튼 중요한 것은 '돌연변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거다.
뭐, 생활에 엇박 하나를 그어보자. 여유가 생기기도 하고, 꽤 신나질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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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을 제외하더라도 항상 사람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오고가고 그 논쟁에서 일종의 '승리'하기 위한 다양한 논리들이 오고간다. 사실 보통의 논쟁에서는 나는 스스로를 별로 드러내지 않고 가운데를 지키려고 하는 편이다.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굳이 뜨거운 감자를 꿀떡 삼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의 이 아웃사이더 기질에 대해서 말한 적이 있던것 같다.) 하지만 어느날 논쟁을 중재하거나, 보고 있노라면 아쉬운점이 많아서 그냥 주저리주러리 생각해 보았다.
토론, 논쟁.
특히 온라인에서의 논쟁.
난 그저 이것의 방법론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1.
먼저 오프라인에서 토론이 이루어지는 형태를 보자. 사람들은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 하는 경우에는 바로바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자신의 말에 대한 청자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바로 답변을 통해 명확한 의사전달을 위해서 부연설명을 할 수도 있고, 잘못 꺼낸 말에 대한 정정 또한 바로바로 이루어 질수도 있고, 정녕 수가 틀린다고 생각하면 눈앞의 갈등상황의 피곤함을 고려해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넘어가 다른 화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그리고 보통의 이러헌 토론의 경우는 지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럼 온라인 상의 토론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온라인 상에서 어떤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일단 피드백이 느리다. 그리고 보통 오프라인에서 처럼 1:1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1:n의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경우가 많다. 즉, 자신의 말을 publish하는 행동인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어떠한 일이 발생을 할까.
사람은 각기 다르다. 그러한 사람들은 개진된 의견(특히 씌여진 글에서)에서 서로 다르게 듣는 경우가 많다. 남자가 자신의 여자친구에게 "오늘은 옷차림이 아주 예쁜데??"라는 말을 건냈다고 하자.
A : 머야 오늘"은"("만") 예쁘다는 거야??
B : 와! 예쁘대 ;)
C : 다른날은 옷차림 말고 다른 것이 예뻤나?
등등과 같이 다양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생긴다.(보다 적절한 예가 생각이 잘 안난다;) 게다가 글이라는 것은 억양과 뤼앙스를 전해줄 수 없으므로 더욱 가지각색으로 화자에게 들릴 수 있는 경우가 발생한다. 게다가 이것이 온라인의 경우에는 스스로 이런 뤼앙스나 정확한 의미를 위한 부연설명에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고, 1:n의 대응방식상 모든 사람에게 즉시 이해가 되는 방식으로 글을 써놓기도 힘든 형편이므로, 논란의 정점에 있는 글은 어떠한 식으로든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써 글로 미리 명확하게 내용을 전달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모든이들에게 명확하기 어렵고, 혹 명확하기 위한 장황함은 오히려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고 논점을 흐릴 수 있기 때문에 그 한계가 있다. (실제로 의견 개진시 부연설명 중의 부연설명을 하는 중간의 또다른 부연설명으로 '부연설명 맨'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나의 경우에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이유때문에 온라인상의 댓글이나 답글을 통한 토론은 한텀 기다려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프라인상의 토론 상대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익숙하게 되어, 온라인 상에서도 그 익숙한 행태로 반대 논리를 펴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보다 온라인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맞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조금더 들어보고 자신의 반대 논리를 결정하던가, 혹은 바로 자신의 논리를 개진하려고 할때에는 아직은 자기 자신이 화자의 모든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한 것 만은 아니라는 겸손함을 보여주는 정도의 여유 말이다.
2.
토론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설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득'을 위한 의견과 '자기 표현 수단'을 위한 의견을 혼동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 같다. 이 두가지의 결정적인 차이는 '설득'은 남을 위한 것이어서 듣는 사람의 언어로 하게되는 것이고, '자기 표현 수단'은 나를 위한 것이어서 듣는 사람의 언어로 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토론에서 감정이 들어가는 경우는 '자기 표현 수단'으로 의견을 개진했을 때 발생한다. 그리고 토론에 감정이 들어가면 토론은 사실 조금씩 어려운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원래 목적이 그냥 내 감정을 표출하고 마는 것이라면 상관은 없지만, 적어도 청자가 있는 상황에서의 글은 '설득'을 위한 방법론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방의 옳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있어서 자신의 의견개진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그래서 자신의 의견에 동조할 수 있도록 길을 제공해 주는(동조하도록..은 너무 교조적일 수 있으므로) 방법으로 토론을 벌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설득'이 목적이 된다면 많은 토론에서 보다 겸손한 말이 오고가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고, 보다 침착한 상태에서 명확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이 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토론의 목적은 그곳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옳고 그름"을 가려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완벽하게 '남'을 설득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것 같지만,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날카로워만 보일 수 있는 논리를 통해서 그것을 찾는 것도 옳은 방법이지만, 방법론상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서 그것을 보다 느린 속도로 빠른 길을 찾아 도출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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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방법은 토론을 지연시키거나, 보다 활발한 토론에 대해서 제동을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말하는 수위에 따라서 서로 의가 상하지 않고, 오프라인에서 얼굴을 보며 예의를 가지고 하는 토론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온라인에서 보다 토론하고 싶어지는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갈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더더군다나 1:n으로 publish하는 글에 있어서 제3자가 보았을때에도 별로 기분 상하는 일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으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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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덧붙이지만,
삼성과 관련해서 그리 반갑지 않은 기사를 다른곳보다 많이 실었던 시사저널의 대표이사로 중앙일보에서 부회장을 지내시던 분이 오고 나서, 삼성과 관련된 특집 기사가 인쇄 직전 빠지게 되었던 대략 1년전의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편집국장의 허락을 득한 기사가 대표이사의 거부로 인쇄직전에 다른기사로 급하게 대체된, 프라이드가 강한 언론사의 역사상 유래가 없던 일로 기억된다. 이 사건을 통해서 기자들은 편집권 독립을 요구했고 대표이사는 직장을 폐쇄하고 자유기고가 등의 글들로 현재의 시사저널을 채우고 있다. 결과적으로 핵심은 회사이름에서 언론이름으로 바뀌었다.(멋지지 않은가?)
한동안 잊고 있다가 우연히 얼마전 시사저널 사주의 집 앞에서 아직도 단식농성을 하고 있고, 농성을 위한 플랜카드을 없애려는 사측의 사람들과 몸싸움이 있었다는 뉴스를 접한적이 있다.
다른 블로거의 말을 빌리자면 메이저 언론에서는 이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메이저 언론의 무관심은 다음의 칼럼에도 잘 나와있다. 기자의 열에 아홉은 시사저널의 기자들을 지지하나 대다수 언론들은 "기괴할 정도로" 침묵한다..라고 칼럼니스트는 말한다.
솔직히 말하면, "에이 어린아이도 아니면서 뭘 그러나. 그들(타언론)이 왜 그러는지 알잖아~(광고때문) 니가 다른 메이저 언론사 기자였어도 이러한 이야기는 오프모임의 술자리에서만 할 수 있었을껄."이라고 누가 나에게 말한다면 음. 나도 고민은 해보겠지만 그들과 같았을것 같다. 내가 그러한 다른 기자였더라도 스스로의 밥벌이를 걸고 책임을 지면서 소위 '굳이' 고난의 길을 걸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그렇게 가만히 머무르기는 너무 식은땀이 흐르는 일이기에, 난 메인에 속할 수 없는 아웃사이더로 나만의 길을 갔겠거니..하고 생각한다. (갑자기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면 난 독립투사가 되었을까??라고 던졌던 어린질문이 생각난다 ㅋㅋ)
생리 [生理]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명사]
1 생물체의 생물학적 기능과 작용. 또는 그 원리.
2 생활하는 습성이나 본능.
..
일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우리가 듣는 소위 사회의 "생리"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마 조만간 이러한 기자들의 파업은 누군가 바라던대로 금방 세간에서 잊혀진 안주거리가 될 것이다. 세상에 이것만이 불공정한 일인가?라고 되묻는다면, 그사람에게는 어떠한 불공정함에 의한 답보상태도 개선의 여지가 없는, 적어도 한 개인이나 한 소규모 단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유흥업소에 들어간 총을 가진 한 대기업 회장 스토리처럼 자극적이어서 공론화되지 않는한, 그들에게는 개선될 여지가 없다.
놀라운 일은, 이러한 일이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한 집단에서 벌어졌다는 것이다. 자본 논리상 어쩔수 없이 언론은 이익집단일 수 밖에 없는가하는 허탈감이 든다. 이익집단은 로비를 해서 살아남는 집단이지 이미 공정함을 가질 수는 없는 집단이다. 그래서 그런 "자본"이 그렇게 무서운건가 보다.
PS.
그렇게 중요한 내용이라면, 차라리 까놓고 사람들에게 교육을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학교다닐때 도덕책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이 더러 있더라도 "정치"책을 한권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고, 소위 "자본"논리에 대한 그늘진 이야기 해주는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바로 생겨먹은 원리라면, 도덕책만 읽었던 사람이 뒤늦게 이런걸 견주어 볼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왜 사람들은 이쁜 도덕책으로 치장을 하고 머릿속으로는 다른 논리들에게 그렇게 많은 공간을 허용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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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타 2007/06/20 23:1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자 ㅅㅂㄹㅁ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지...
그렇긴 하지만 막상 내가 그 입장에서 어떻게 할지는 나도 확신 못하겠다. 광고가 줄면 자기 월급에도 영향을 미칠 게 확실하니 만큼...
경제학적으로 생각하면 언론도 정부도 그냥 하나의 경제 주체이고 정부의 서비스나 뉴스 제공도 mp3와 똑같은 상품일 뿐.
경제 시스템 내에서 독점되어 있는 상품은 늘 비용을 유발하지. 결국 기자 정신으로는 해결이 안 되고 다른 상품처럼 최대한 경쟁 체재로 만드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고 생각해.. -
라쎄
2007/06/21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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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저널의 진실은 당자자만이 알고 있겠지요. ^^
우리는 어쩜 지금 전혀다른 논점에서 사실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Lampard
2007/06/21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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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집단이 가지고 있는 프라이드일지.. 특권의식일지..
현상황만을 보면, 그들은 어떤 프라이드도 어떤 특권의식도 가질 자격이 없지요. 그냥 월급장이고 오히려 자신의 힘을 이용하는 악랄함을 엿보게 됩니다. (좋은글 읽고 트랙백 남깁니다.) -
2007 맥월드에서 공개된 iPhone과 Apple TV로 온통 난리다.
어제 아침부터 부지런히 관련 메일들이 오고가고,
모든사람들의 모니터에는 Apple iPhone의 동영상이 부지런히 돌아간다.
점심시간에는 모두들 iPhone 이야기다.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이 쓴글을 읽다보니, Digg에서 유사이래 최대의 digg를 받았단다.
발표 프리젠테이션을 보면서 느낀점은,
맥월드에서 발표하는 한결같이 똑같은 옷차림의 스티브 잡스는 여전히 프리젠테이션의 신처럼 보였고, 칼칼한 발음의 목소리에는 카리스마 마저 느껴진다.
특히 기대 이상으로 괜찮아 보이는 iPhone과 Apple Computer Inc.를 Apple Inc.라고 사명을 바꾸면서 새로운 category 제품으로의 공식적인 진출은 Apple이 이제 승부수를 던진다는 비장함마져 담고 있는 듯 했다.
Apple,
일반적으로 새로운 제품이라던가, 비즈니스 모델을 내놓는 곳은 쉬이 문을 닫는다.
왜냐하면, 시작이 항상 센세이셔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처음이기때문에 시장의 파이도 작을것이고, 제품 혹은 비즈니스 모델의 빈틈도 많을 것이고, 일단 시작이 네임벨류를 얻고나면, 그를 이어 수많은 후발주자들이 그 빈틈을 메꾸면서 보다 편리한, 보다 저렴한 동일 컨셉 제품으로 시장의 파이를 키우며 달려들기 때문이다.
기술 특허나 비즈니스 모델 특허와 같은 형태로 보호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다양한 회피 기법 및 기술을 법으로 판단한다는 특허 특유의 모호성 때문인지, 기억하기로 처음이어서 시장을 "선점"을 할 수 있는 경우보다, 개척자로서 이름만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떻게 보면 과거 Apple은 이름만 남은 개척자인 셈이였다.
그 옛날 제록스 PARC(사실 이 녀석이 가장 개척자이긴 하다 ㅎㅎ)에서 개발한, "GUI"라는 것을 처음 탑재한 제품인 Star라는 컴퓨터 이후에, 잡스는 선공을 위하여 GUI를 탑재한 Personal Computer 매킨토시를 개발하여 시장에 내어 놓았다.
결과는 후발주자인 MS에게 OS 시장을 홀라당 빼앗겨버린 이름뿐인 개척자가 되어 버렸다.
이후 Mac OS를 탑재한 Apple Computer는 일단 국내에서는 그래픽을 전공한 사람들이 주로 구입하거나, 프리젠테이션 툴인 키노츠라는 어플리케이션이 뽀대나서 의사분들이 프리젠테이션할때 쓰려고 구입한다는, 예쁘고 앞서가지만 대중적이지 않은 이미지의 소수를 위한 컴퓨터였다.
하지만 Apple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이름이 되지 않았다. 꾸준히 브랜드 이미지를 유지하고, 이로 인하여 기업에는 흔하지 않는 수많은 소위 Fan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유사한 카테고리의 유사한 기능의 제품을 내놓아도 외관디자인, UI, 마케팅 등이 Apple의 제품을 앞서가는 제품으로 인식되도록 하는데 모든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러한 브랜드를 앞세워 iPod로 재기를 하고, 이제 iPhone을 발표했다.
이미 파이가 커질대로 커진 휴대폰 Biz에 제품을 들이밀수 있는 큰 기업이면서도, 다른 경우와는 달리 어설프지 않은 개척자와 같은 이미지를 지닌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좋은 제품과 잡스의 프리젠테이션으로 무장하고 기존 업체에게 선공을 날린다.
사실 이번에 공개된 iPhone이나 Apple TV가 전혀 새로운 제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기능 자체는 대부분 기존에 있던 기능이고, 휴대폰이나 TV 박스같은 것들은 이미 많은 회사에서 수많은 인터페이스로 만들어내고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Apple의 제품은 모두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 제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이에 사람들은 열광하게 된다.
마치 하나의 '옷'이라는 것을 디자인 하는 Fashion과도 같이, 동일한 기능을 새로운 제품으로 어필할 수 있게 하는 힘을 Apple은 가지고 있다.
휴대폰이라는 거대한 파이를 얼마나 잠식할지 6월 미국에서 출시되어봐야 알겠지만, 이미 경쟁사들은 Apple로 인하여 바빠졌다. 그만큼 iPhone은 그동안 여기저기서 사용되었던 인터랙션의 일종의 결정체라고 봐도 무관할 정도의 깔끔하고 앞선 인터페이스를 컨셉이 아닌 "실제"로 제공했다.
아마도 사장이 프리젠테이션을 할정도로 Driven Force가 있는 회사가 많아져야, 저런 제품이 계속해서 뉴스거리를 휘날리며 세상에 속속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Apple의 UI팀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참 여럿 컨셉을 재미나게 녹여낸 그 실력에 경의를 표한다.
Apple은 잡스때문이라고만 하기는 힘든, 꼭 한사람이 자신의 취향대로 제품컨셉, 외관, UI 디자인한 것처럼 묘한 identity를 지닌다.
보아하니, Apple은 당분간 잘나갈것 같다.
생각에 아마도 MP3P, Phone, TV Box, Computer와 그 연결고리중 하나인 iTunes Service,
모두가 시너지 효과를 충분히 가질수 있는 아이템이고 그 효과는 몇년뒤에 나타나지 않을 듯 싶다.
아마도 Computer자를 회사이름에서 빼고, 이제 토탈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거듭나게 되지 않을까.
ps1. iPhone image (from 맥월드)
ps2. 사고 싶다!
이 광고. 조금 얕아보이진 않는가??
왜 그러냐면,
그런 시절이 있었다. 이름은 들어보았는가 X세대. 아마 이녀석이 시작이었을것 같다.
90년대초. 이병현이었나 김원준이었나가 얼굴에 스킨을 챡- 바른다. 이른바 트윈X 스킨, 로션 광고 였다. 이거 우연치 않게 나도 한세트 선물받아서 사용했던 기억이 나는데, 아무튼 이때부터 시작이 되었단 말이다. 이른바 소위 개성시대.
어쩌면 억눌렸던 80년대의, 3S(Sports, Sex, Screen)으로 숨구멍을 틔워주려던 은근한 나라정책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정치적으로 억눌렸던 사람들을 위했던 출구는 돌이킬수 없는 세대교체를 만들고, 90년대 들어 사람들은 나라살이에 무관심지고, 점점 모든 마케팅들이 "우리, 단체"가 아닌 "개인"에게 촛점이 맞춰지게 된다.
이것의 대표적인 시작이 X세대라는 것이다. 원래 X세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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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neration X : 미국의 작가 더글러스 쿠플랜드(Douglas Coupland)의 장편소설
주인공 앤디, 댁, 클레어는 스물에서 서른 살 사이의 20대들이다. 이들은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나 배울 만큼 배웠고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미국의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출세, 가족, 돈 등에 전혀 관심이 없고,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에서 시간제 일을 하고 여가를 보내면서 지낸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X세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서구 산업국가에서 태어난 세대를 가리키는 유행어가 되었는데, 이들의 삶은 공허함과 우울함으로 특징지어지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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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다.
물론 우리나라 언론과 마케팅은 이를 십분 활용하여, '나를 위한 소비'를 주창했고, 이에 알게 모르게 동조된 대중들은 자신의 characteristic과는 달리 어느덧 X세대의 의미는 신세대, 이기적인 세대, 소비적인 세대, 개성있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아이콘은 찢어진 청바지 정도.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 모두 개성을 주창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뭉뚱그려져 X세대인 것이다.
암튼, 이때까지만 해도 철저히 개인적으로 흐르지 못한 과도기 적인 무리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이후 마케팅 및 사회현상의 분석을 위하여 n세대 등 다양한 분류를 시도하였지만, X세대만큼의 임팩트를 가지지 못한채 그 수명을 다하였다.
90년초의 시작된 이러한 트렌드는 이후 다양한 광고 카피로 '자신'만의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난 나야. - 리바이스
난 소중하니까요. - 로레알
아름다운 개인주의 - 칼리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 현대카드 (이건 아닌가? @.@)
등등. 아. 기억이 잘 안난다;;
이것의 뒤늦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저 '나는 나를 좋아한다' 광고인 셈이다.
이른바 '난 소중하니까요'광고.
이러한 사회적 현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달았는가.. 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의 답은
'글쎄요'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그저 시간과 돈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광고카피에 무턱대고 자신이 소중하다기 보단, 자신의 의지를 담고 그에 따른 결과에 소중하다고 느껴지게 했으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후자의 경우 광고는 타이래놀 광고나, 나이키 광고같은 머리아프고 육체적인 광고카피에는 사용은 되지만 말이다. 흐흐.
나는 단체를 좋아하진 않는다. 나도 동시대를 살아오면서 단체에서 개인으로 가치관이 옮겨간 동일한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조화로운 개인이다. 내가 나를 어떤의미에서 소중해 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소중함을 위한 투자는 트렌드에 넘어가는, 그저 한시대를 풍미하는 소비적 탕아로서 전락할 뿐이다.
그저 이틀동안 청바지 똑같은거 안입는다고 발목부분을 세절기에 갈아버리면서 출렁출렁 다니고(그 담날은 어떡할건데??),
개성시대라고 휴대폰 모니터를 벽에 박박 긁어서 사용하는게 미덕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소중한 타인 자신을 이해해 주고, 의지적 자아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참 신기한건, 그런 사람은 특징적이어 보이지 않아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티가 팍팍 난다니깐.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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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님께서 쓴글 아니었나요?? 루루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