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여름에서 가을로 흐르고 있던 때로 기억한다.
유난히 후텁지근했던 그 해 여름을 기억하려는 동네 뒷산은 언듯 보기에 아직까지 창창한 푸르름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슬쩍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들여다 보면 군데군데 색이 바래져가고 있었고, 굳이 멀리 산을 둘러다 보지 않아도 길옆 풀섶의 작은 풀들은 벌써 색을 비워가면서 다가올 계절과 닮을 채비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진 바람에 되려 한여름의 더위가 따뜻하게 그리워질 무렵,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은 부지런히 가을로 달리고 있었다.
그 아이가 전학온 것은 아마 그 무렵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날 학교에 지각을 했던 난, 그 아이가 선생님 옆에 서서 소개를 받고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러 또박또박 걷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볼 수 있었던 그 첫대면의 순간은 가질 수가 없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몰래 뒷문으로 돌아 들어 올 무렵 딱 걸린 머쓱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자리에 앉을때, 그 아이에겐 처음본 많은 낯선이들 사이에서 딱히 내가 누구인지 그리 궁금해 하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던 그 아이의 착한 눈매가 처음으로 기억났다.
사실 학교생활은 나에게 그렇게 흥미있는 활동은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등교를 하던 난 매번 버스밖 똑같은 읍내의 아침 모습을 매번 신기하게 구경하다가 정류장을 훌쩍 지나쳐 지각하기 일쑤였다. (사실 어느날 생각해 보니 학교에 천천히 가기 위해서 한정거장을 돌아걸어오는 그런 일을 반복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시간에는 온통 땡땡이 칠 몽상을 하거나 그러다 지루해지고 나면 혼자 한일을 다 한듯 꾸벅꾸벅거리는게 다반사였다. 도통 흥미가 없었다. 그저 국어시간이나 또박또박 글을 읽겠다고 혹은 산수시간에 어려운 곱셈의 답을 맞추겠다고 주먹을 불끈 쥔채로 자신이 들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 번쩍 손을 들어올리는 아이들을 뒷켠에서 물끄러미 보면서 신기해하던 그런때였다. 돌아보면 뭐가 그리 좋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를 가지고 집에 오는 길에 한참 바깥을 돌아다니고 뛰어다니던 일이 나에겐 가장 관심이 있는 학교생활의 일부였다.
사실 그 아이의 등장으로 갑자기 내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난 여전히 그 다음 다음날에도 지각을 했고 늘 그렇듯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를 찾아갈때, '아 그 지각생이구나'라고 알아보는 그 아이의 눈빛을 보고 들게된 생각이 달라진 것이라면 달라진 것이었을까. 그 눈빛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괜히 우물쭈물 설레이게 되는 기분으로 지각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학교 전체적으로 알게 모르게 일렁이고 있었다. 시골학교 치고는 규모가 컸던 학교이지만 다른 재미난 꺼리들이 적었던 아이들에게 예쁘장한 아이가 새로 전학왔다는 것은 당연히 큰 사건이었다. 옆반의 몇몇 아이들은 뒷문으로 빠꼼히 구경하다 가는 아이도 있었고, 또래보다 성숙했던 어느 남자애는 하교길에 말을 붙였다가 퇴짜를 맞았다는 둥의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흘끗 보면 그 아이는 주로 책을 들여다 보던가 가끔 옆자리의 여자아이와 말을 터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말 수가 많지는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약간 무표정에 가까웠던 얼굴에 가끔씩 함박 웃음이 도는 표정은 벌써부터 하교길에 이길저길 둘러가는 유일했던 나의 취미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또 다른 몇명의 남학생이 퇴짜를 맞았다는 소문이 돌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 아이는 처음보다 많이 표정이 밝아졌고 친구들과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가 더 많아진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가끔 지각을 했고, 지각해서 자리로 가는동안 온 반아이들의 주목하는 도중의 한 명인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칠때면 그걸로 선생님의 꾸증은 지나칠 수 있었다. 등교길에 버스 한정거장을 더 가 는 일은 - 그렇게 자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 하교길의 동네구경과 함께 취미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무렵 학교엔 행사준비가 시작되었다. 옆 읍내의 학교와 한곳에서 경쟁을 해야 하는 생각보다 큰 규모의 행사여서, 각 반별로 부지런히 운동선수를 뽑거나 운동선수로 뽑히지 않은 아이들은 조를 짜서 응원을 위해 플랜카드도 만들고 벽보도 그리는 등 이런저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시골에서 이런 종류의 행사는 아이들이 신내하기 마련이었고, 벌써부터 앞으로 냉큼 나서서 이것저것 지휘를 하는 반장 아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학교 전체에 생기가 감돌았다.
어느날 아침,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와서 나는 지나쳐버린 정류장을 느릿한 걸음으로 돌아오며 등교를 하였으나, 그날 나는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몸이 아파서 며칠 결석을 할 거라고 지나는 아이들이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 그날 지각에 대한 선생님의 꾸증은 몹시 호되었다.
'많이 아플까?'
며칠후 수척해진 모습으로 학교에 온 그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전날밤 많이 아파서 울었는지 빨개진 눈이 유난히 힘들어보였다. 친구들의 위로에 웃어보이는 그 아이의 표정을 흘끗 보았다. 그날도 2교시가 끝나고 그 아이는 조퇴를 했으며, 선생님은 그 아이가 며칠 더 조퇴를 해야할 것 같다는 말을 반 아이들에게 건냈다.
반면에 학교는 여전히 행사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고, 우리반 아이들도 그아이를 뺀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후에 남아 늦게까지 행사준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사실 나는 행사에도 그리 관심이 없던 터였지만 다른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같이 늦게까지 남아서 도움이 되는 일에 손을 더했다. 다음날 방과후 아이들의 행사 준비는 저녁까지 계속 이어졌고, 늦은시간어서 그랬을까 부산히 교실을 정리하고 다 같이 바깥으로 하교길에 나섰다. 나가던 도중 잊고 온 물건이 있다면서 먼저 가라고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로 돌아오는 내 손에는 내가 좋아해서 항상 가방안에 하나 넣어두었던 알이 굵은 커피맛 사탕과 얼른 나았으면 좋겠다는 메모가 들려있었다. 지나가면서 보이지 않도록 그 아이의 책상 서랍안에 깊숙히 넣어두고는 혼자 벌개진 얼굴을 하고 집으로 곧장 향했다.
그 아이는 이틀 더 조퇴를 하였으나, 나는 왠지 그 뒤로 그 아이를 흘끗 쳐다볼 수도 없었다.
이젠 학교뒤의 산을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지 않아도 이미 그들은 울긋불긋 색을 바꾸고 있었고, 문득 서늘해진 바람에 해가 짧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합동 운동회가 열렸다. 역시 두 학교의 연합으로 벌어진 운동회에서의 경쟁은 참으로 볼만했다. 수업에는 관심이 없었던 나도 여러대항전에서 목이 쉬도록 열심히 우리 학교를 응원했다. 결과는 우리학교의 낙승. 운동선수로 뛴 아이들은 그들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응원해온 아이들은 그 아이들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만족한듯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운동회는 끝났고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들떠있는 사이에 난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하교길 취미를 살려볼까 하고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길을 나섰다.
교문을 나서는 순간 저만치 앞에 그 아이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아이 이제 아픈것도 다 나았고, 오늘 학교대항 운동회에서는 이겼고, 오랜만에 걷는 것도 즐겁고, 나도 모르게 불쑥 달려가 말을 건냈다.
"같이 걸을래?"
몇초뒤에 말을 걸고 있는 내 모습에 내가 놀래버렸다. 조금전 나는 그냥 걸어나오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나는 말을 건내고 있었고, 내 앞에는 그 아이가 있다. 다행히 그 아이는 매번 지각하던 나를 알아봤고 인사를 건냈다.
"안녕?"
어느 가을의 늦은 오후의 바람이 차가웠는지 따뜻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마 좀 따뜻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집방향이 다른 골목 모퉁이에서 나는 대뜸 가방에 있던 커피맛 알사탕을 건내주고는 인사고 뭐고 냅다 뛰었다. 웬지 뒤에서 그 아이가 보고 있을 것만 같았고 날은 가을이고 바람은 따뜻하고 가방은 가벼웠고 하늘은 높았고 웃음은 나왔으며 뛰는건 빨랐다.
..
어느 겨울 우리집 근처에 놀러온 그 아이와 버스를 타고 돌아가던 도중 옆자리에서 손시려워 하면서 '후욱'하고 입김을 불어넣었던 그 아이의 손을 가까이서 본적이 있었다. 매섭고 차가운 바람에 손이 많이 시려웠는지 약간 노란색을 띄고 있었다. 나는 내 두꺼운 코트의 바깥주머니에 차가운 그 아이의 손을 넣어주었다. 얼음장 같은 그 아이의 손은 하나도 차갑지 않았다.
..
그해 겨울이 지나기전 난 더이상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지금도 어느 추운 겨울날이 되면 그 노란손을 가진 아이는 겨울에 장갑은 잘 끼고 다니나, 요즘은 손난로도 많은데 하나씩 사가지고 다닐까 그저 가끔씩 궁금해 질때가 있다.
end.

양재 시민의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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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님, 축하한다. 그리고 수고했다. 너도, 수선씨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