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출발할 당시 나는 모든 루트를 정하지 않았었다. 사실 일러스트가 멋진 어느 일본 여행서에 나온대로, 아마도 폴란드에서 슬로바키아로 내려와서 헝가리를 지나 루마니아까지 들어가겠거니.. 운이 좋으면 불가리아 까지 한번 들어가 보자.. 이런 심산으로 처음에는 유럽 여행길에 올랐었다. 하지만 폴란드의 크라쿠프에서의 유대인 지구를 둘러본 영향때문인지, 루마니아의 예쁜 건물이 있는 브라쇼보 같은 곳보다 최근 복잡한 역사를 지닌 구 유고연방의 여러곳을 둘러보고 싶어졌었다. 그래서 어느날 버스에서 잠을 깨어보니, 아침 7시의 사라예보에 있더라.
결국은 궂은 날씨과 무거운 공기로 휴양지 쪽으로 들렀다가 독일로 비교적 일찍 올라가게 되었지만 말이다. 사라예보 - 모스타르 - 듀브로브니크를 지나서 동유럽의 지속적으로 오는 비에 안되겠다 싶어서, 비행기를 타러 스플릿으로 와서 독일로 와버리게 된다. 웃긴건 독일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나니 듀브로브니크 둘째날에서부터 날씨가 좋아졌다. 교통편이 조금 어렵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세르비아, 코소보 지역과 몬테네그로를 향해 꿋꿋하게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사라예보. 나 어릴적 세계사를 배울때만해도 '유고 연방'란 이름이 익숙했던 곳. 대학교 언저리의 TV뉴스에 '보스니아 내전'으로 이름을 기억했던 곳. 1차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이 되었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이 벌어진 '사라예보'. 세계 정세를 논할때 '불안'한 지역으로 꼽았었던 '발칸 반도'의 한 중심에 난 서 있었다.


이곳에 읽어볼만한 글이 있다. 필요한 내용을 발췌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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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 울타리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상대에게 무서운 증오심을 품고 끔찍한 폭력을 자행했던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앞에서 보았던 몇몇 국가들의 독립선포였다. 옛 유고 연방은 3개의 언어, 3개의 종교 그리고 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였다. 여러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수백년간 지속된 민족, 종교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 공화국 주도의 유고 연방군이 침공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유고 내전 초기에는 세르비아 공화국과 나머지 공화국의 전쟁이었지만, 곧 사정이 달라진다. 각 공화국 내의 세르비아계가 독립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문자 그대로의 내전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독립을 선언한 대부분의 공화국은 내부로부터의 전화에 휩싸이게 된다.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포하자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가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내전 발발 1년만에 보스니아 지역의 70%에 이르는 지역을 점령한다. 보스니아에서의 내전은 민족 갈등 뿐 아니라 종교 갈등의 측면도 강하다. 이 지역의 인구분포를 보면 그리스 정교를 믿는 크로아티아계가 18% 정도이다. 각 분파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그리고 민족의 이익을 앞세워 극렬하게 맞부닥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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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연방의 해체와 보스니아 혹은 코소보 사태에 대한 글을 검색하면 할 수록 사실 좀 복잡했던 것이 사실이다. 간단히 정리해 보면,
구 유고연방의 중심에 있던 세르비아 공화국이 일으킨 국가전쟁에서,
각국의 세르비아계가 동조하고 세르비아 공화국이 이를 지원하게 되여 결국 국가내 민족분쟁으로,
또한 이러한 민족 분쟁 가운데에 그동안 쌓여왔던 종교에 대한 분쟁으로 까지 확대된,
아주 비참한 케이스가 아닐 수 없다.

유대인을 모두 잡아들였던 2차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는 세르비아계의 다른 인종에 대한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 그의 일환으로 남자는 죽임을 당하고, 낙태를 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면서 이슬람의 여자를 범하는 대목이 가장 극에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웃긴건, 이 모든것이 불과 10년전에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사실 낯선 이방인으로서 이곳의 뿌리깊은 갈등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 크로아티아-세르비아계, 알바니아계-무슬림.. 등과 같이 나라-인종-종교가 모두 뒤섞인 이 지역에 사람들이 현재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이곳은 아직도 온전히 평화가 정착되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평화적이어 보인다고 할지라도, 또다시 그 뿌리깊은 갈등을 내부로 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민족이 뭐길래, 종교가 뭐길래.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대의'를 위해 '소의'를 저버린다고 생각하지만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왜 아직 어린 세르비아계 군인이 전쟁중에 다른 종교의 친구에게 총을 쏘아대던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하고 넓은 '대의'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사실 보통, 정도나 등급의 차이로 사람들은 저버릴것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임의로 판단하긴 하지만 말이다.

발칸반도라는 세계의 중심부는 아닌, 비교적 최근의 전쟁은 후에 역사속에서 어떠한 조명을 받고 어떠한 결과로 그려질지 궁금하다. 세르비아 공화국이 전쟁을 시작한 것이지만, 3자의 입장에서 '전쟁'이라는 것에 있어서 이런 다름에서 출발한 전쟁의 선악구분이 참 어려워 지는 것을 느낀다. 그저, 전쟁은 안쓰러운 것이고, 내가 속한 입장이 있는 것일뿐. 탈레반과 항일 광복군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뭐 이런 어리석은 질문 말이다. (실제 차이가 궁금해서 던진 질문은 아니다.) 답은, 현실속에서는 결코 바뀔수 없는 나의 입장..이란게 있다.. 이겠지?? 그래서 광복군은 좋고, 탈레반은 나쁜가?? 만약, 세상을 아우르는 신이 있고, 그 신이 데려가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공간이 있다면 대체 누굴 데려가야 한단 말이더냐. 이것은 믿음의 여부로 공간을 가르는 특정종교에서보다 훨씬 원초적인 문제다. 바로 공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쓰다보니 말이 잘도 샌다;;)

그냥 그만큼 망연자실하게 많은 생각을 들게 하는 곳이 이곳,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였다.







암튼.

숙소를 잡고 짐을 푼다음 날이 잔뜩 흐린 길을 나섰다. 무슨 홈스테이 같이, 화장실과 샤워실을 쉐어한 그런 private room을 잡았다. 꼬득꼬득한 영어발음을 하던 travel agency 아주머니와 숙소까지 안내를 해주던 이빨 빠진 아저씨가 생각난다. 전후, 이런저런 후유증으로 딱히 직업을 가지지 못하고 있는 아저씨는 동네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다니면서 나를 숙소에 데려다 주었다.



이곳은 카톨릭 성당.




이곳은 이슬람 모스크.




최근의 내전으로 인해서인지, 많은 건물의 곳곳이 이렇게 벌집이 된 상태로 그대로 건물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의 흔적을 촬영하는 것이 혹시 이곳 사람들이 보기에 상처를 들추는 일이 될까 싶어서, 드러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찍었던 기억이 난다.




이곳은 Latin Bridge. 국립도서관에서 강변을 따라 이곳으로 오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가브릴로라는 세르비아계 청년에게 암살당한,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시초가 되었던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이다.





론리 플레닛에 케밥이 이곳에서 유명하다고 써있었다.




이 곳의 케밥은 내가 알던, (영국에서 먹었던) 터키식의 케밥과 달리, 다진고기를 떡볶이 떡처럼 만들어서 양파를 넣어주는 방식이 제일 많았다. 사실 저거 먹고 나서까지도 금방 저것이 케밥인줄 몰랐다;; 무슨 특산요리 이름이 Cevapi 인가 했네..




시내는 생각보다 좁았다. 구석구석 돌아다녀도 한두시간이면 모든 골목을 구경할 수 있을 법 했다. 시내 가운데에는 낮은 건물의 기념품가게가 줄지어 있었고, 사이사이 모스크를 구경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로 붐비는 도심을 나와서 외곽을 걸어다녀 보기로 했다. 국립 도서관 앞에서 둘러보다가, 길건너의 언덕과 멀~리 보이는 호텔위의 전망대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문득 길을 건너려는데, 도서관 샛긴 건너편에서 히잡을 쓴 여인과 전쟁의 상흔를 한 시야에서 볼 수 있었다.




길을 건너자 사람이 한움큼 사라졌다.
관광객님아~ 요기를 봐요..라고 말해주는 것 보다, 골목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올라갈때는 아무생각없이 올라갔는데, 저 언덕의 끝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깜짝이야.
묘지를 가까운 곳에 두고 산다. 그만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거나, 혹은 죽음이라는 것이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언덕을 내려와 시내와는 반대편 길로 한참을 걸었다. 시외각으로 빠져나가는 도로위로 마땅히 인도가 없었다. 아마 사람이 올라가는 길은 따로 있나보다.. 하면서 헥헥.. 오르막길을 올랐다. 오르는 길에 보았던 언덕위의 집들.




저 묘지의 우측 끝에 아까 서성거렸었다.
분홍색 집 한채를 보고, 쉰들러가 보았던 빨간코트의 여자애가 생각났다.




드디어 올랐다~
사실 올라오면 view가 좋을 거라고 내심 기대했었으나, 결과적으로 훨씬 더 많은 공동묘지 place만 찾아버렸다;;




꼬마아이를 데리고 올라온 어느 부인과, 노는 아해들로 보이는 몇몇이 질척거리는 정상위에서 머물고 있었다.




다시 도심길로 내려왔다. 내려오늘 길은 올라왔던 길보다 훨씬 안가파르고 훨씬 가까운;; 길이었다. 모스크의 빈도와 차림새로 보았을때, 이곳의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생활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무얼 믿는다기 보단, 그 안에서 존재해야되는 이유 자체가 그들의 생활인거다.

내려오는 길에 작은 슈퍼에서 귤4개, 사과1개, 물 1.5리터를 1유로 주고 샀다.




다시 도심으로 내려와서, 근처 호스텔의 바에 가서 인터넷을 잠깐 사용하고, 맥주를 한잔 마셨다. 나오니 그나마 날이 개고 있었다.




다시한번 시내구경 고~고~. 이사진 마음에 든다 ㅎㅎ











다음 목적지를 위해 travel agency에 들렀다. 사라예보 교통편 올림.




사라예보에서 모스트르로 가는 기차의 풍경이 좋다는 론리의 말을 믿고, 모스타르..라는 낯선곳으로 다음날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건물은 내 숙소건물.
목적을 가지고 발사된 총에는 맞힐 대상이 있었다는 말이다. 총알 구멍 앞에 멍하니 서있다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나뭇가지에 잎이 몇번 나왔다 떨어져 갈수록, 그 총알 구멍의 깊이도 얕아지겠지. 나같은 관광객이 폐허와 같은 건물을 보고 쓴웃음으로 지나칠때, 이곳 사람들은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재건에 온힘을 쏟을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역설적으로 생동감이 넘친다.



이 날밤, 독주를 한잔 마시고 잤다. 그 왜, 슬로바키아 군인이 가르쳐 준대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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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짱아 2007/09/17 16: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이쿠! 여기도 총을 비롯해서 금지되는 것들이 많네-

    일본도 규슈지방 쪽엔 묘지가 시내 곳곳에 있던데, 가족이였던 가까운 사람들이라 오히려 잘 보살펴줘야해서 근처에 묘지를 마련한다더라구.
    멀면 잘 안 찾게되고 그건 가족의 도리가 아니라면서,, 그 말 듣고보니 그것도 맞는 말인듯 싶더라구-

    • Favicon of http://www.henbros.com BlogIcon minchul 2007/09/18 03: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묘지를 볼때마가 가슴이 아팠던게,
      묘지가 전부 새거였다는거.
      1993년 이후 몇년동안의 년도가 묘비에 많이 새겨져 있더라.

      우리나라야 전설의 고향에서 많이 봐서 그렇지,
      가까이 모시고 기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함.